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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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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는 독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의 딸로, 벨기에의 레오폴 1세의 누이이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이다. 1803년 라이닝겐 공작 에미히 카를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남편 사후 1818년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재혼하여 딸 빅토리아를 낳았다. 켄트 공작의 사망 후 딸 빅토리아의 섭정 역할을 수행하려 했으나, 윌리엄 4세와의 갈등으로 실패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후에는 딸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1861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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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지 도가 그린 켄트 공작 부인의 초상화, 1818년경
조지 도가 그린 초상화, 1818년경
본명마리 루이즈 빅토리아
출생명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출생일1786년 8월 17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코부르크
사망일1861년 3월 16일
사망지잉글랜드 버크셔 주 윈저 프로그모어 하우스
매장일1861년 3월 25일
매장지윈저 성 성 조지 예배당 왕실 지하 납골당
1861년 8월 1일 버크셔 주 프로그모어, 켄트 공작 부인 영묘
서명
작위
작위명라이닝겐 후비
켄트 공작 부인
가족 관계
가문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 (1826년까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1826년부터)
아버지프란츠,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어머니아우구스테 로이스 추 에베르스도르프 백작부인
혼인 정보
배우자에미히 카를 추 라이닝겐 (1803년 결혼, 1814년 사별)
켄트 공작 에드워드 (1818년 결혼, 1820년 사별)
자녀카를 추 라이닝겐 후작
페오도라 추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녀
빅토리아 여왕

2. 초기 생애와 가문

빅토리아는 1786년 8월 17일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 내 코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Marie Luise Viktoria|마리 루이제 빅토리아de였다.[2] 그녀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와 로이스-에버스도르프 백작부인 아우구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딸이자 일곱 자녀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형제자매 중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와 훗날 초대 벨기에 국왕이 되는 레오폴 1세가 있다. 레오폴 1세는 1816년 당시 영국 왕위 계승자였던 웨일스 공주 샬럿 (1796-1817)과 결혼하여 영국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또한 빅토리아 공녀의 조카, 즉 오빠 에른스트 1세의 아들은 훗날 그녀의 사위가 되는 앨버트 공이다. 이러한 가문 배경은 빅토리아 공녀가 유럽 왕족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는 기반이 되었다.

3. 라이닝겐 공국에서의 삶

빅토리아 공녀는 첫 번째 결혼을 통해 라이닝겐 공국과 인연을 맺었다. 1803년 라이닝겐 공작 에미히 카를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며, 남편이 사망한 1814년부터 아들 카를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공국의 섭정을 맡아 통치했다.[1]

3. 1. 첫 번째 결혼

1803년 12월 21일, 빅토리아는 코부르크에서 라이닝겐 공작 에미히 카를과 결혼했다. 에미히 카를 공작은 이것이 두 번째 결혼이었으며,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로이스-에버스도르프의 헨리에타 소피 백작부인(1767–1801)은 빅토리아의 이모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미히1804년 9월 12일1856년라이닝겐 후작
안나 테오도라 아우구스테 샤를로테 빌헬미네1807년 12월 7일1872년1828년, 에른스트 1세와 결혼


3. 2. 섭정 활동

첫 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 빅토리아 공녀는 아들 카를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라이닝겐 공국의 섭정을 맡았다. 이 섭정 활동은 1818년 그녀가 재혼하기 전까지 이어졌다.[1]

4. 켄트 공작과의 결혼과 영국 왕실

켄트 공작 사후, 빅토리아 공작 부인은 개인 비서인 아일랜드인 존 콘로이의 도움으로 영어를 배우고 영국의 사정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콘로이의 영향 아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윌리엄 4세 국왕과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윌리엄 4세는 자녀를 모두 잃고 후계자가 없었기에 조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호의적이었으나, 공작 부인이 이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불쾌감을 느꼈다. 공작 부인은 미래의 왕태후로서 빅토리아 공주의 사적인 여행을 "학업"이라 칭하며 공적인 비용 지원을 요구하거나, 켄싱턴 궁전의 방을 과도하게 점유하고, 심지어 왕과 왕비에게만 허용되는 왕의 예포를 딸을 위해 사용하도록 육군에 요구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아델라이드 왕비와 윌리엄 4세의 서자들에게도 여러 불편을 끼쳐 왕의 혐오감은 극에 달했다. 윌리엄 4세는 만년에 자신의 생일 축하 만찬 연설에서 "짐은 짐의 수명이 1년 더 길어지기를 염원한다. 그러면, 여기에 앉아 있는 젊은 레이디(빅토리아 공주)가 무사히 성년이 되고, 이 끔찍한 인물(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이 섭정이 되는 불행한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공작 부인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후, 켄트 공작 부인과 존 콘로이가 연인 관계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이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이는 여왕의 자손에게 나타난 혈우병 유전과 관련지어 퍼진 이야기였는데, 영국 왕실 내에 이전까지 혈우병 환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공작 부인이 임신했을 당시에는 독일에 있었고 콘로이와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이 소문은 근거가 없다. 현재는 여왕 또는 켄트 공 중 한 사람의 돌연변이로 인해 혈우병 유전자가 발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직후부터 어머니와 다른 침실을 사용하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능한 보좌관들의 도움으로 점차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여왕이 앨버트 공과 결혼한 후, 켄트 공작 부인은 첫 손녀인 빅토리아 공주의 탄생에 참여하는 등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며 모녀 관계는 이전보다 개선되었다고 전해진다. 켄트 공작 부인은 1861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윈저에 묻혔다. 같은 해 남편 앨버트 공까지 잃게 된 빅토리아 여왕에게 1861년은 매우 비극적인 해가 되었다.

4. 1. 두 번째 결혼

1817년 빅토리아의 오빠 레오폴드의 아내인 샬럿 공녀가 사망하면서 영국 왕실에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이에 의회는 샬럿 공녀의 삼촌이자 조지 3세 국왕의 아들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며 결혼을 권유했다. 그중 한 명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가 빅토리아에게 청혼했고, 빅토리아는 이를 받아들였다.[3]

두 사람은 1818년 5월 29일 코부르크의 에렌부르크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고,[4] 같은 해 7월 11일에는 에서 공동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 공동 결혼식에서는 에드워드의 형제인 클래런스 공작(훗날 윌리엄 4세 국왕)이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와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직후 켄트 공작 부부는 생활비가 저렴한 독일로 이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빅토리아는 임신했고, 공작 부부는 아이를 잉글랜드에서 낳기로 결심하고 급히 돌아왔다. 유능한 조직가였던 존 콘로이 경은 켄트 부부가 첫 아이 출산을 위해 제때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1819년 4월 23일 도버에 도착한 그들은 켄싱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 그곳에서 딸 알렉산드리아 빅토리아 공주(훗날 빅토리아 여왕)를 낳았다.[3]

4. 2.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

첫 남편 에미히 카를과 사별한 빅토리아는 결혼 상대를 찾던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의 청혼을 받아 1818년에 재혼했다. 부부는 처음에는 물가가 저렴한 코부르크에 살았으나, 빅토리아는 아이를 영국에서 낳기로 결정하고 임신한 상태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1819년 5월 24일, 켄싱턴 궁전에서 딸 알렉산드리아 빅토리아 공주(훗날의 빅토리아 여왕)가 태어났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태어난 지 불과 8개월 만에 남편 켄트 공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빅토리아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첫 결혼에서 받은 약간의 연금으로 생활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저택이 있는 코부르크로 돌아갈 것을 고려했다. 당시 영국 왕위 계승 서열에서 딸 빅토리아보다 앞서 있는 사람은 섭정 왕태자 조지, 요크 올버니 공작 프레데릭, 클래런스 공 윌리엄 등 세 명의 시아주버니였다. 조지 4세와 프레데릭 공에게는 자녀가 없었지만, 클래런스 공에게는 젊은 왕비 아델라이드가 있어 후계자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딸의 미래에 기대를 걸기로 결정했다. 영국 내각 역시 켄트 공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으며, 켄싱턴 궁전의 일부를 거처로 제공했다.

켄트 공작 부인이 영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영국의 사정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개인 비서가 된 아일랜드인 존 콘로이의 도움이 컸다.

4. 3. 켄트 공작의 죽음과 섭정 문제

1835년 조지 헤이더 경의 켄트 공작 부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는 1820년 1월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3] 그의 미망인이 된 공작 부인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첫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수입으로 생활할 수 있는 코부르크의 궁전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남을 이유가 적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 상황은 매우 불확실했다. 에드워드의 세 형, 즉 조지 4세 국왕과 요크 공작은 자녀가 없었으며, 세 번째 형인 클래런스 공작(훗날 윌리엄 4세 국왕) 역시 생존한 자녀가 없었다.

켄트 공작 부인은 코부르크에서 조용히 사는 것보다 딸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영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또한 남편의 빚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지원을 구해야 했다. 에드워드 공작 사후 어린 빅토리아 공주는 왕위 계승 서열 3위였지만, 영국 의회는 재정 지원에 인색했다. 공작 부인에게 제공된 지원은 미미했고, 그녀는 낡은 켄싱턴 궁전의 일부 공간에 거주하며 국가 예산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주요 재정적 지원자는 오빠인 레오폴드였다. 레오폴드는 샬럿 공주와의 결혼으로 영국 의회로부터 연간 5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연금을 평생 보장받고 있었다.

1831년, 조지 4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윌리엄 4세(전 클래런스 공작)가 60세가 넘어 즉위했다. 윌리엄 4세에게는 생존한 적자가 없었고, 그의 왕비 아델라이드 역시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어린 빅토리아 공주는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공작 부인이 미래에 섭정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켄트 가문에 대한 영국의 재정 지원을 크게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의회는 1831년 8월, 공작 부인과 그녀의 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5] 이 결정에는 레오폴드가 벨기에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영국의 연금을 포기한 것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5. 켄싱턴 시스템과 왕실과의 갈등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182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미망인이 된 빅토리아 공작부인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남편의 빚까지 떠안게 되어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3]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은 불확실했지만, 딸 빅토리아 공주(훗날 빅토리아 여왕)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보고 영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켄싱턴 궁전의 일부에 거처를 마련하고 영국 정부와 오빠 레오폴드의 재정 지원에 의존했다.

이 시기 공작부인은 남편의 회계 감사관이었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콘로이 경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콘로이는 공작부인의 재정 관리뿐 아니라 여러 결정에 깊이 관여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 두 사람은 빅토리아 공주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이른바 '켄싱턴 시스템'을 고안하고 실행했는데, 이는 빅토리아 공주가 어린 나이에 즉위할 경우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고 콘로이가 실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과 관련이 있었다.[7][14]

켄싱턴 시스템의 운영과 콘로이의 영향력 확대는 당시 국왕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삼촌인 윌리엄 4세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공작부인은 콘로이의 영향을 받아 윌리엄 4세를 불신했으며[11], 왕이 조카 빅토리아 공주에게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또한 왕실 행사에 불참하거나[11] 왕의 권위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듯한 행동으로 왕의 분노를 샀다.[11] 윌리엄 4세는 공작부인이 콘로이라는 '악한 조언자'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여겼고, 1836년에는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이 살아남아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는 것을 막고 싶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했다.[12] 이러한 왕실과의 깊은 갈등은 빅토리아 공주가 1837년 성년으로 즉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 1. 켄싱턴 시스템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빅토리아 공주'' by 윌리엄 비치, 1821


켄트 공작부인은 남편 사후 영국 왕실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였고, 특히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영국 사회와 왕족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의 군인이자 자신의 회계 감사관 겸 개인 비서였던 존 콘로이 경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콘로이는 공작부인의 재정 관리뿐 아니라 공보, 조언, 정치적 대리인 역할까지 수행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으며, 일각에서는 연인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다.[6]

콘로이와 공작부인은 어린 빅토리아 공주(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양육을 통제하기 위해 소위 켄싱턴 시스템(Kensington System)이라는 엄격한 규칙을 고안했다. 이 시스템을 누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된 목적은 빅토리아 공주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할 경우,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고 콘로이가 공주의 개인 비서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켄싱턴 시스템 하에서 빅토리아 공주는 다른 아이들은 물론, 아버지 쪽 친척들을 포함하여 공작부인과 콘로이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인물들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되었다. 이는 공주를 외부 영향으로부터 격리시켜 세상 물정에 어둡고 나약하게 만들어 어머니와 콘로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7] 공작부인은 당시 국왕 윌리엄 4세의 사생아들 때문에 궁정 출입을 꺼렸고,[8] 딸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며 성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극도로 신경 썼다.[9] 빅토리아 공주는 매일 밤 어머니와 같은 침실에서 자야 했고,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으며, 인형과 애완견 킹 찰스 스패니얼인 대시하고만 놀 수 있었다.[10]

켄싱턴 시스템은 켄트 공작부인과 윌리엄 4세 사이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공작부인은 콘로이의 영향을 받아 윌리엄 4세를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고,[11]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왕이 조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1831년 윌리엄 4세의 대관식에도 공주의 서열 문제를 이유로 참석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왕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으로 비춰졌다. 같은 해, 콘로이와 공작부인은 빅토리아 공주를 데리고 전국 순회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공주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미래의 섭정으로서 공작부인의 입지를 다지려는 정치적 행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1831년 11월 빅토리아 공주가 미성년 상태로 즉위할 경우 공작부인이 단독 섭정이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공작부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왕이 사용하기로 예약된 켄싱턴 궁전의 방을 차지하고, 왕의 사생아들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등 왕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왕비는 조카 빅토리아를 아꼈지만, 공작부인의 방해로 인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결국 1836년 8월,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윌리엄 4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공작부인과 빅토리아 공주가 있는 앞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그는 자신이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되는 18세까지 살아남아, "악한 조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켄트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는 것을 막고 싶다는 소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2] 이 사건으로 왕과 공작부인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빅토리아 공주는 항상 왕과 왕비에게 예의를 갖추었다.[13]

콘로이는 빅토리아 공주가 미성년자로 즉위하여 어머니가 섭정이 되면 자신이 막후 실세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14] 그는 윌리엄 4세가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공주 본인보다는 섭정이 될 공작부인에게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공주가 18세 생일을 맞이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고, 빅토리아는 성인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콘로이는 빅토리아 공주에게 즉위 후 자신을 개인 비서로 임명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빅토리아 공주의 반감만 샀다. 빅토리아는 어머니가 콘로이의 계획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압력을 가한 것에 깊은 분노를 느꼈고, 여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콘로이를 궁정에서 내쫓고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마저 자신의 거처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켰다. 이로써 켄싱턴 시스템은 막을 내렸고,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의 야심 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5. 2. 윌리엄 4세와의 불화

1831년, 조지 4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윌리엄 4세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4세에게는 생존한 적자가 없었고, 그의 왕비 아델라이드 역시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어린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 추정 상속인이 되었고,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은 미래의 섭정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켄트 가문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재정 지원 증가로 이어졌으며, 1831년 8월 의회는 공작 부인과 빅토리아 공주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5] 이는 공작 부인의 오빠인 레오폴드가 벨기에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영국에서 받던 연금을 포기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켄트 공작 부인은 왕실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으며, 특히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콘로이와의 관계는 많은 의혹을 샀다. 콘로이는 공작 부인의 회계 감사관이자 개인 비서로 19년 동안 일하며 재정 관리뿐 아니라 공보, 정치 자문 등 비공식적인 역할까지 수행했다. 둘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고, 이 때문에 컴벌랜드 공작 등 왕족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연인 관계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6] 윌리엄 4세는 콘로이를 "존 왕"이라고 부르며 그의 영향력을 경계했고, 아델라이드 왕비 역시 켄트 공작 부인에게 콘로이에게 지나친 권한을 주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였다.[6]

켄트 공작 부인은 매우 보호적이었고, 소위 "켄싱턴 시스템" 하에서 다른 아이들과 거의 격리된 상태에서 빅토리아를 키웠다. 이 시스템은 공작 부인과 콘로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 사람들 (그녀의 아버지 가족의 대부분 포함)과 공주가 만나는 것을 막았고, 그녀를 나약하고 그들에게 의존하게 만들도록 설계되었다.[7] 켄트 공작 부인은 윌리엄 왕의 사생아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스캔들로 여겨 궁정을 피했고,[8] 어쩌면 딸이 성적인 부적절함의 조짐을 피하도록 주장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성이 나타나도록 촉진했을 것이다. 빅토리아는 매일 밤 어머니와 침실을 함께 썼고, 정기적인 시간표에 따라 개인 교사에게 공부를 배웠으며, 인형과 그녀의 킹 찰스 스패니얼인 대시와 함께 놀았다.[10]

아마도 콘로이의 영향으로 켄트 공작 부인의 가문과 윌리엄 4세 사이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고, 공작 부인은 왕을 지나치게 성적인 폭군으로 여겼다.[11] 공작 부인은 감히 할 수 있는 한에서, 왕이 조카에게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빅토리아가 윌리엄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대한 이견으로 막았는데, 윌리엄 왕은 대관식 동안 빅토리아가 형제들을 따라 행진하도록 명령했으나 공작 부인은 이것을 의도적인 모욕으로 해석했다.[11] 웰링턴 공작은 이 결정이 콘로이의 탓이라고 말했다.[11] 윌리엄의 대관식이 열린 1831년에 콘로이와 공작 부인은 빅토리아와 함께 일련의 왕실 투어를 시작하여 그녀를 국민들에게 노출시키고 잠재적인 섭정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11] 그들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성공했고, 1831년 11월에 빅토리아가 어린 여왕이 되면 공작 부인이 단독 섭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11] 공작 부인은 또한 왕이 자신을 위해 예약한 켄싱턴 궁전의 방을 차지하고, 통치 전후에 왕의 사생아인 피츠클라렌스를 무시함으로써 왕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11]

왕과 아델라이드 여왕은 조카를 아꼈지만, 소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켄트 공작 부인과의 갈등으로 좌절되었다.[11] 왕은 공작 부인이 아내에게 불경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여 1836년 8월 자신의 마지막 생일 연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잡았다. 공작 부인과 빅토리아 공주를 포함한 연회 참석자들에게 윌리엄은 빅토리아 공주가 18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살아남아 켄트 공작 부인이 섭정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앞으로 9개월 더 내 생명이 유지되기를 하느님께 믿는다... 그러면 나는 왕관의 추정 상속녀인 그 젊은 여성의 개인적인 권한에 왕실 권한을 행사하고, 현재 내 곁에 있는, 악한 조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넘기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12]



켄트 공작 부인과 왕과 여왕 사이의 균열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빅토리아는 항상 그들 모두를 친절하게 대했다.[13]

콘로이는 후원자와 자신에 대한 큰 기대를 품었다. 그는 빅토리아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섭정 정부가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섭정법 1830에 따라 이 정부는 공주의 어머니가 이끌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남편의 사망 후 독일에서 이미 그 직책을 수행했다).[14] 공작 부인의 개인 비서로서 콘로이는 진정한 "왕좌 뒤의 권력"이 될 것이었다. 그는 윌리엄 4세가 빅토리아가 성년이 되어 성인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오래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키우는 동안 빅토리아에게는 거의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후자가 왕위에 오르자 콘로이는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 위험에 처했다. 그는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른 후 그를 개인 비서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이 계획 역시 역효과를 낳았다. 빅토리아는 콘로이의 계획에 대한 어머니의 지원과 콘로이를 개인 비서로 선언하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받은 것에 분개했다. 그 결과 빅토리아가 여왕이 되었을 때 공작부인을 자신의 거처와 떨어져 별도의 숙소로 내쫓았다.

6.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후,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과 존 콘로이가 불륜 관계이며 빅토리아 여왕이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다. 이는 여왕의 후손에게 나타난 혈우병 유전을 근거로 한 추측이었으나, 켄트 공작 부인이 임신 당시 독일에 있어 콘로이와 만날 수 없었으므로 근거 없는 소문이다. 현재는 여왕 또는 켄트 공작에게서 발생한 돌연변이가 혈우병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직후 어머니와 거리를 두었고, 레이첸 남작 부인과 폰 슈토크마이어 남작 등 자신의 보좌관을 통해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후 앨버트 공과의 결혼 등을 거치며 모녀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다.

6. 1. 딸과의 관계 회복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자, 콘로이의 계획에 대한 어머니의 지원과 그를 개인 비서로 임명하라는 압력에 분개했던 여왕은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을 자신의 거처에서 떨어진 별도의 숙소로 옮겼다. 이처럼 초기에는 모녀 관계가 소원했으나, 여왕의 첫 아이인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윈터할터가 그린 켄트 공작 부인, 1857년


켄트 공작 부인은 예상치 못하게 빅토리아 여왕의 핵심 인물로 다시 환영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여왕의 남편이자 공작 부인의 조카인 알버트 공의 요청으로 레첸 남작 부인이 해고되었다. 레첸 남작 부인은 오랫동안 공작 부인과 콘로이를 불륜 관계로 의심하며 혐오했었기에, 그녀의 영향력이 제거된 것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 둘째, 이로 인해 여왕은 알버트 공의 영향력에 더 열려 있게 되었고, 알버트 공은 여왕에게 어머니와 화해하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콘로이가 유럽 대륙으로 사실상 망명하면서 그의 분열적인 영향력도 사라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콘로이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공작 부인의 재정 문제도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조언자들 덕분에 회복되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켄트 공작 부인은 자상한 할머니가 되었고 이전 어느 때보다 딸 빅토리아 여왕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15] 한 명의 "할머니"로서 제1왕녀 빅토리아의 출생에 참여하면서 모녀 관계는 이전보다 더욱 친밀해졌다.

6. 2. 만년과 죽음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공과 결혼한 후, 켄트 공작 부인은 첫째 딸 빅토리아의 출생에 참여하는 등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며, 모녀 관계는 이전보다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켄트 공작 부인은 1861년 3월 16일 오전 9시 30분, 딸 빅토리아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왕은 어머니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으며, 어머니의 서류를 읽고 어머니가 자신을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6] 여왕은 존 콘로이와 레첸 남작 부인이 자신과 어머니 사이를 "사악하게" 갈라놓았다고 비난하며 크게 상심했다.[27]

프로그모어에 있는 켄트 공작부인의 묘


켄트 공작 부인은 윈저의 윈저 성 근처, 윈저 홈 파크에 위치한 켄트 공작부인의 묘에 안장되었다.[28]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윈저 그레이트 파크 내 올 세인츠 왕립 예배당에 그녀를 기리는 창문을 헌정했다.[29]

7. 유산과 평가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유럽 왕가와 연결되었으며, 특히 두 번째 남편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의 사이에서 훗날 대영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을 낳았다. 남편 사후, 어린 딸 빅토리아가 영국의 왕위 계승자가 될 가능성을 보고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아 딸의 양육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의 개인 비서 존 콘로이에게 크게 의존했으며, 그의 영향 아래 딸 빅토리아에게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정치에 관여하려 하면서 당시 국왕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왕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는 그녀의 야심과 콘로이의 영향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문제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콘로이와의 관계로 인해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특히 혈우병 유전 문제)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초기에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모녀 관계가 소원했지만, 여왕이 앨버트 공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다. 특히 앨버트 공의 중재와 콘로이의 영향력 제거는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년의 공작 부인은 자상한 할머니로서 손주들을 돌보며 여왕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861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윈저에 묻혔다. 그녀의 죽음은 같은 해 남편 앨버트 공을 잃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켄트 공작 부인의 삶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들로 인해 복합적인 평가를 받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로서 영국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7. 1. 빅토리아 여왕과의 관계

켄트 공작 부인과 그녀의 딸인 빅토리아 여왕의 관계는 복잡하고 다층적이었다. 남편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사망한 후, 공작 부인은 어린 딸 빅토리아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을 보고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당시 빅토리아 공주는 왕위 계승 서열 3위였으며, 공작 부인은 딸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이 섭정이 될 것을 기대했다.[3]

이 시기 공작 부인은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콘로이 경에게 크게 의존했다. 콘로이는 공작 부인의 회계 감사관이자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 두 사람은 빅토리아 공주를 외부 세계와 차단하고 자신들에게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 소위 '켄싱턴 시스템'이라는 엄격한 양육 방식을 고안했다. 이 시스템은 빅토리아가 아버지 쪽 가족을 포함하여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인물들과 만나는 것을 막고, 철저한 감시 속에서 생활하도록 했다.[7][10] 공작 부인과 콘로이는 빅토리아가 미성년 상태로 즉위할 경우, 공작 부인이 섭정이 되고 콘로이가 여왕의 개인 비서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공작 부인과 콘로이의 야심과 행동은 당시 국왕이었던 윌리엄 4세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공작 부인은 왕의 사생아들을 이유로 궁정을 피했으며,[8] 왕이 조카인 빅토리아에게 접근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막았다. 심지어 빅토리아가 윌리엄 4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것도 막았는데, 이는 빅토리아의 행렬 순서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콘로이와 함께 빅토리아를 데리고 왕실 순회 여행을 강행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또한 공작 부인은 왕을 무시하고 켄싱턴 궁전의 방을 무단으로 점유하는 등 갈등을 증폭시켰다. 격분한 윌리엄 4세는 1836년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공작 부인을 "악한 조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빅토리아가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이 살아남아 공작 부인이 섭정이 되는 것을 막고 싶다는 소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2]

어머니와 콘로이의 강압적인 통제와 정치적 야심은 어린 빅토리아에게도 큰 상처와 반감을 남겼다. 빅토리아는 콘로이를 개인 비서로 임명하라는 압력에 강하게 저항했으며, 1837년 여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분리시키고 콘로이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첫 딸 빅토리아 공주를 낳으면서 모녀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여왕의 남편이자 공작 부인의 조카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버트 공은 오랫동안 공작 부인과 갈등 관계였던 여왕의 가정교사 레첸 남작 부인을 해고하고, 여왕에게 어머니와의 화해를 권유했다. 또한 분열의 원인이었던 존 콘로이가 유럽 대륙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작 부인은 자상한 할머니로서 손주들을 돌보았고, 빅토리아 여왕과 이전 어느 때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15] 공작 부인의 재정 문제 역시 여왕과 그녀의 조언자들의 도움으로 회복되었다. 초기 극심했던 갈등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녀 관계를 회복했다.

7. 2. 혈통 논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에게서 나타난 혈우병포르피린증은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의 혈통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그녀가 아일랜드 출신의 개인 비서였던 존 콘로이와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이 콘로이의 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6] 이 소문은 영국 왕실 내에 이전까지 혈우병 환자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만, 켄트 공작 부인이 임신 중일 때는 독일에 머물렀고 콘로이와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학자 A. N. 윌슨은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가 켄트 공작이 아닐 수 있다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혈통 논란에 불을 지폈다.[16] 첫째는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에게서 이전 왕실에는 없던 혈우병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점이고, 둘째는 빅토리아 여왕 이전 왕실에 만연했던 포르피린증이 그녀의 후손에게서는 사라졌다는 점이다.[16]

그러나 윌슨의 주장은 여러 반박에 직면했다. 첫 번째 주장인 혈우병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 만약 빅토리아 여왕이 다른 남성의 딸이라면, 그 남성은 혈우병 환자였거나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이 혈우병 보인자여야 한다.[17] 당시 의료 수준으로 혈우병 남성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기는 매우 어려웠으며,[17] 켄트 공작 부인이 보인자였다는 증거 또한 없다. 혈우병은 X 염색체 연관 유전 질환이다.[17]
  • 혈우병은 약 30%의 사례에서 부모에게 없던 질환이 자녀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발생한다.[18] 특히 빅토리아 여왕의 경우처럼 아버지가 고령일 경우 돌연변이 발생 확률이 더 높아진다.[19][20][21][22]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 후손에게 나타난 혈우병은 당시 유럽 왕가들 사이에서 '코부르크 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23]


윌슨의 두 번째 주장인 포르피린증의 소멸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반박이 있다.

  •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황후 프리데리케가 포르피린증을 앓았다는 증거가 존재하며, 황후 프리데리케의 딸 샤를로테 폰 프로이센 공주와 손녀 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 공주에게서도 포르피린증의 증거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24] 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촌인 글로스터 공자 윌리엄 역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에 포르피린증 진단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4]
  • 조지 3세를 포함한 이전 영국 왕족들이 포르피린증을 앓았다는 주장 자체가 유전적 증거가 부족하며, 진단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25]


결론적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에 대한 논란은 존재하지만, A. N. 윌슨 등의 주장을 뒷받침할 명확한 과학적 증거나 역사적 사료는 부족하다. 혈우병의 경우 유전자 돌연변이와 같은 다른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며, 포르피린증 역시 후대에도 나타났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7. 3.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는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여러 작품에서 그려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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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Victoire (genannt) - Deutsche Biographie https://www.deutsche[...]
[3] 간행물 Longford 2004a
[4] 웹사이트 Papers of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 earn https://www.rct.uk/g[...]
[5] 웹사이트 House of Lords Journal Volume 63: 31 August 1831 Pages 954–955 https://www.british-[...] HMSO 2021-09-07
[6] 문서 Hibbert, p. 27; Longford, pp. 35–38, 118–119; St Aubyn, pp. 21–22; Woodham-Smith, pp. 70–72. The rumours were false in the opinion of these biographers.
[7] 문서 Hibbert, pp. 27–28; Waller, pp. 341–342; Woodham-Smith, pp. 63–65
[8] 문서 Hibbert, pp. 32–33; Longford, pp. 38–39, 55; Marshall, p. 19
[9] 서적 Great Tales from English History, Volume 3 Little, Brown, and Company 2006
[10] 문서 Waller, pp. 338–341; Woodham-Smith, pp. 68–69, 91
[11] 서적 A Treasure of Royal Scandals Penguin Books 2001
[12] 문서 Somerset, p. 209
[13] 문서 Allen, p.225
[14] 문서 Hibbert, p. 31; St Aubyn, p. 26; Woodham-Smith, p. 81
[15] 문서 Packard, p. 85
[16] 서적 The Victorians Hutchinson 2002
[17] 서적 Victoria's Daughters St. Martin's Pres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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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간행물 The Royal Hemophilia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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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In the Blood: God, Genes and Destiny HarperCollins 1996
[22] 서적 Royal Maladies: Inherited Diseases in the Royal Houses of Europe Trafford 2008
[23] 웹사이트 An Interview with Dr. Helen Rappaport https://www.hemophil[...] 2022-03-29
[24] 서적 Purple Secret: Genes, "Madness" and the Royal Houses of Europe Bantam Press 1998
[25] 간행물 King George III and Porphyria: A Clinical Re-Examination of the Historical Evidence 2010
[26] 문서 Hibbert, p. 267; Longford, pp. 118, 290; St Aubyn, p. 319; Woodham-Smith, p. 412
[27] 문서 Hibbert, p. 267; Marshall, p. 152; Woodham-Smith, p. 412
[28] 웹사이트 Royal Burials in the Chapel since 1805 https://www.stgeorge[...]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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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Victoria & Albert' brings royal couple to life https://news.google.[...] 2012-08-05
[31] 뉴스 'The Young Victoria': Royal romance story is beautifully filmed and acted – Gusto http://www.buffalone[...] 2012-01-13
[32] 웹사이트 Meet the cast of Victoria http://www.radiotime[...] 2016-08-29
[33] 웹사이트 Meet the cast of Queen Charlotte: A Bridgerton Story https://www.radiotim[...]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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